성경사전 2012. 6. 25. 16:02

<이스라엘 : Israel >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후에 새로 불려진 야곱의 이름이다(창 32:28).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으로 야곱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민족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출 12:37; 민 1:45). 또 이것은 솔로몬 사후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열 지파의 반란으로 이루어진 북왕국을 이르는 이름이었다(왕상 5:13; 12:16; 14:19, 29; 호 1:1; 4:15; 암 1:1; 3:14).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는 남유다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였고(사 5:7; 렘 10:1; 겔 13:2; 미 3:1)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회복된 공동체를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스 2:2).
신약에서는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을 이르는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다(마 8:10; 갈 6:15-16).
이스라엘 역사
통일왕국 시대 : 사사시대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부재로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약세를 면치 못했다. 블레셋과 같은 주변 민족의 위협이 강해지자 이스라엘은 왕정을 원하게 되었다(삼상 8:19-20). BC 1050년경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암몬, 블레셋, 모압, 에돔 족속과 전쟁을 치르며 이스라엘을 방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사장만이 수행할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직접 드리는 등 점차 교만해 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다(삼상 15:11-23).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삼상 31:7-13) 왕권은 사울의 후손이 아닌 다윗에게 넘어갔다(삼하 5:3-5).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므로 예루살렘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어 나갔다(삼하 6:12-15). 다윗은 정복 사업을 활발히 수행하여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통치를 위한 행정 조직도 갖추었다(삼하 8:15-18).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다윗이 마련한 토대 위에 무역을 발달시켜 국가 수입원을 늘리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꾀하였다(왕상 4:20-34; 10:14-29) 성전 건축과 같은 중요한 업적을 이루기는 했으나(왕상 6:1-38) 그의 절대군주적인 행동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왕상 12:1-5).
솔로몬의 사후 그에게 불만을 품었던 여로보암이 북쪽의 세력을 규합하자 이스라엘은 곧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분열되었다(왕상 12:16-24).
분열왕국 시대 :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통치 때에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 부담으로 불만을 느꼈다. 북쪽 지파는 남쪽의 유다 지파보다 인구도 많고 영토도 넓지만 왕정으로 얻는 이익보다는 불이익이 크다고 판단하여 다윗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왕상 12:20). 남북 왕조의 분열은 약화되었던 주변국가가 다시 세력을 얻어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에 타격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왕상 14:25-28 등). 남북간의 종교적 분열은 두 세력이 다시 하나로 연합될 수 없게 하였다(왕상 12:28-33).
남왕국 유다는 다윗 왕조를 계속 유지해 갔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부터 마지막 왕인 호세아까지 9왕조 19명의 왕이 통치하였다. 북이스라엘 왕들 중에 8명은 암살되었다.
1. 북왕국 이스라엘(BC 931-722)
여로보암 왕조(BC 931-909) :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여로보암은 세겜에 수도를 정하고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왕상 12:25-30). 또한 레위인을 몰아내고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절기도 마음대로 정하였다(왕상 12:31-33).
바아사 왕조(BC 909-885) :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왕상 15:28-29). 바아사는 남 유다를 침공하여 괴롭혔다(왕상 15:32). 바아사 왕조는 시므리의 쿠데타에 의해 끝을 맺었다(왕상 16:11-13).
오므리 왕조(BC 885-874) : 오므리에 의해 창건된 왕조로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 등 4대에 걸쳐 약 44년 간 북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오므리는 반란을 일으켜 엘라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므리를 7일만에 무너뜨리고(왕상 16:9-20) 이스라엘의 왕권을 얻었다(왕상 16:15-22). 그는 왕이 되어 수도를 디르사로 정하고 6년 동안 치리하다가(왕상 16:23) 사마리아로 옮겼으며(왕상 16:24) 모압을 정복하고 다메섹과 유다와 동맹을 맺는 등 군사적으로 강력한 이스라엘을 이루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시돈 출신의 이세벨을 아내로 맞고 바알을 섬겼다(왕상 16:29-33). 아합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으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왕상 20장; 22장).
예후 왕조(BC 841-752) : 오므리 왕조의 타락이 심해지자 예후는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왕조를 일으켰다(왕하 9:14-10:36). 예후는 바알 신앙을 근절하려 했으나 정치적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북 이스라엘의 말기(BC 752-722) : 앗수르의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북이스라엘은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호세아 왕은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에 대한 반역을 일으켰다. 그러나 앗수르의 군대는 사마리아를 3년이나 포위하였고 마침내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점령되어 백성들은 유배되고(왕하 17:23) 앗수르에 점령당한 타민족들이 사마리아에 정착했다(왕하 17:24-33). 앗수르의 혼합 정책은 사마리아에 북이스라엘 백성과 타민족을 혼합시켜 외부의 지배층에 대한 반발을 야기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고 순수한 남왕국의 유대인은 그들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 남왕국 유다 → 유다 왕국을 보라.
바벨론 포로이후 시대 : BC 586년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대하 36:11-21). 그 후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스 1:1-11).
헬레니즘 시대 : 느헤미야 이후부터 마케도니야의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자료는 거의 없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점령으로 서방과 동방이 만나 하나의 헬레니즘을 형성하게 되었다.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은 죽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제국을 3개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헬레니즘을 꽃피웠다. 애굽에는 프톨레미 왕조가 세워졌고 시리아에는 셀류쿠스 왕조가 세워졌는데 지리적으로 애굽과 시리아의 중간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BC 200년까지는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은 곧 셀류쿠스 왕조에게로 넘어갔다.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은 헬레니즘의 신봉자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층 중 일부는 이미 헬레니즘의 추종자가 되었다. BC 168년 안티오쿠스는 안식일 준수와 할례의 금지, 돼지를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릴 것 등 유대인의 종교를 무시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마카비 반란을 일으켰다.
하스몬 왕조 시대 : 마티티야후 제사장이 죽자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가 지도력을 발휘했다. BC 164년 이방인에게 더렵혀졌던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고 마카비 가문은 급부상하게 되었다. 마카비의 뒤를 이은 요나단은 BC 152년 셀류쿠스 왕조의 내분을 틈타 스스로 대제사장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요나단의 뒤를 이은 시몬은 유대인의 대제사장이며 사령관, 지도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셀류쿠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권을 회복하게 되지만 평범한 모디인의 제사장 가족이 대제사장직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이들은 대제사장직에만 만족하지 않고 왕권을 함께 누리며 하스몬 왕조가 되었다. 요한 힐카누스, 알렉산더 야나이, 샬롬 찌온으로 이어지는 왕권은 형제간인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힐카누스 2세의 왕권 다툼으로 내리막길을 가게 되었다. 형제의 왕위 다툼은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고(BC 63) 100여 년간의 짧은 유대인 자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 시대 : 하스몬 왕조가 몰락하면서 새로 등장한 세력은 이두매 출신의 헤롯이었다. 헤롯은 BC 40년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의 왕으로 임명받자 그를 반대하는 무리를 처단하고 BC 37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하스몬 왕조의 잔존 세력을 차례차례 숙청했다. 헤롯은 로마를 등에 업고 백성들에게 강압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잡은 로마의 보호 아래 헤롯은 영토를 넓혔고 경제 부흥을 꾀했다. 헤롯의 사후 왕국은 아켈라오, 빌립, 안티파스가 나누어 통치를 하게 되었다. 유대를 맡은 아켈라오가 AD 6년 로마에 의해 해임되고 유대는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통치 기간 중(AD 41-44) 총독이 물러가고 자치가 회복되는 듯 싶었으나 그가 죽자 다시 총독이 유대에 파견되었다. AD 66년 가이사랴에서 시작된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반란은 점차 갈릴리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켰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흩어져서 2000년 방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성전 파괴 이후
미쉬나, 탈무드 시대 :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사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유대교의 성격을 바꾸어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구전 율법도 함께 받았다고 믿었다. 구전 율법이 방대해지자 AD 220년 랍비 예후다는 이것을 집대성하여 ‘미쉬나’(반복, 연구하다의 의미)를 만들었다. 성문 율법을 설명하고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전 율법 미쉬나는 랍비들의 해설이 추가되어 탈무드로 완성되었다. 티베리야를 중심으로 AD 4세기 말 예루살렘 탈무드(또는 팔레스타인 탈무드)가 편찬되었고 한 세기 후에 바벨론에서 바벨론 탈무드가 편찬되어 유대인의 구전 율법이 완성되었다.
비잔틴 시대(AD 325-640) :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이스라엘은 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탄압을 가해 왔다. 이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밖으로 흩어졌지만 국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곳곳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모슬렘 시대(AD 640-1091) : 중동 지역을 장악한 모하마드 알리의 영향력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쳤다. 모슬렘 교도는 비잔틴 제국을 물리쳤고, 이스라엘은 기독교인이 물러가고 모슬렘이 차지했다. 교회는 파괴되거나 모슬렘의 모스크로 변경되었다. 모슬렘이 이스라엘을 정복하면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그 땅에 거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밖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슬렘이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인과 유대교를 박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 제국 내에서 유대인의 철학, 문학, 종교를 꽃피울 수 있었다.
십자군 시대(AD 1091-1291) : 성지 이스라엘을 이교도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명목하에 교황 우르반 2세는 십자군을 소집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은 많은 유대인과 모슬렘 교도들을 학살하였다. 유럽에서도 십자군은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세속적인 야망과 종교적인 야망이 결합하여 일어난 십자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목적을 상실했고 모슬렘이 십자군의 최후 요새인 악고를 점령하자 막을 내렸다.
맘룩 시대(AD 1291-1517) : 십자군을 몰아낸 맘룩은 이집트의 모슬렘이었다. 십자군이 세운 많은 건축물과 교회들을 파괴했고 남아 있던 유대인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많은 지역이 파괴되면서 이스라엘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황폐한 시기를 지내게 된다.
오스만 터키 시대(AD1517-1917) : 오스만 터키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새 주인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통치되었다. 슐레만 대제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주민들은 다시 늘어났다. 이스라엘 밖에 있던 유대인들의 이스라엘로의 이주가 증가했다. 갈릴리의 사페드를 중심으로 유대교의 신비주의가 발전했다.
영국 위임통치 시대(AD 1917-1948) :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1917년 발포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의 정책은 유대인에게 호의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영국군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여했던 유대인들은 반(反)영국 투쟁으로 나섰다. 이미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아랍인들의 반발도 거세어져 갔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복잡해지자 1947년 UN에 이스라엘 안을 상정하였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독립 : 19세기 말 시온주의에 자극받은 유대인들은 조직적으로 이스라엘 재건을 꿈꾸기 시작했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불모의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터키나 영국 모두 이스라엘 개척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정착하여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유대인의 이주에 반대했다.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에 의하여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하는 비극을 맛보았다. 1947년 UN은 팔레스타인을 두 개의 국가로 분할하여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1948년 5월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주변의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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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낭송가 김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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